아일라의 노트
솔로베이 씨가 내게 원한이 있는지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나도 로비아, 그리고 언니처럼 거짓말을 한 것이다.
…나는 마음속의 원한을 털어놓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처럼 선하고 진솔한 사람은 이 끔찍한 악의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 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다. 솔로베이 씨는 이런 하찮은 일을 알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을 겪어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 고통을 들을 의무는 없다. 설령 그가 진심으로 듣고 선의의 눈물을 흘린다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저 또 다른 선한 마음이 상처받을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 로비아가 우연히 보여 준 수많은 방적실 중에, 타인의 불행에 눈물 흘릴 자는 웃음을 지어야 할 선량한 사람뿐이다. 달 아래 세계의 규칙에서 선행은 늘 악보로 보답받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쓸데없는 슬픔을 더해주기 싫다.
…난 거짓말을 미워했으나, 이제는 자발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아마 이 십여 년 동안의 (…), 바로 이 순간에 대한 징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소금의 귀녀에서 구라바드 지니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극형을 받은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하물며 나처럼 (…)의 죄에 물든 사람은 벌받는 게 당연하다.
은빛 방적실이 이미 내 목을 옭아맸다면,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나 혼자 더 많은,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을 것이다…
…용의 후예가 세운 거대한 기둥과, 우리 선조가 피난처로 여긴 성소 외에 모든 성벽과 고탑, 요새와 성전은 철거해야 한다. 서리달에서 온 것은 서리달로 되돌려야 한다. 오래된 격리와 폐쇄는 일시적인 야망과 망념만 부추길 뿐이다. 자연을 숭배하고 이방인과 친하게 지내며, 죽은 자의 교만이 아닌, 아무도 믿지 않는 도덕으로 우리의 방적실을 그들과 구분해야 한다. 그래야만, 또 다른 로비아도, 또 다른 나도 없을 것이다…
…수십 년 뒤, 새로운 달의 신이 태어날 것이다. 하… 아이러니하게도, 로비아가 그토록 갈망했던 모든 것은 결국 헛수고였다. (…)에게서 언니를 납치한 그 남자가 태어난 대신, 예정대로 신성한 후계자(원래 우리의 왕이 되었어야 할 사람)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스네즈나야에 더 큰 혼란을 불러오는 것에 그쳤을 뿐이다. 새로운 달의 탄생은 그녀와 무관했으며, 그녀는 그 소녀의 도래도 예견하지 못했고, 성결한 왕좌가 단 한 번도 파괴된 적이 없음을 알지 못했다…
…내가 살아서 그 순간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방적실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지만,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 죄에 물든 사람은 순수한 달빛을 볼 자격이 없으니까…
…어쨌든 사람들은 반드시 믿어야 한다. 새로운 달은 선행과 우정, 협력을 위한 행동에만 기뻐하며, 그 밖의 모든 기도와 제사에는 관심 없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숭고한 이상도 달 아래 오염 속에서 퇴색되고 말 것이다…
…신들의 방적실은 너무 눈부셔서, 그녀가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서리달의 자손은 선택의 권한을 오직 그녀 본인이 쥐게 해야 한다… 그녀에게 어떤 보답도 요구해서는 안 되며, 그녀는 누구의 마음속에서도 완벽한 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서리달의 딸, 새로운 달의 소녀… 그녀가 행복한 꿈을 꿀 수 있기를… 서리달이 내 죄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기를… 나는 한때 수없이 그녀의 이름을 저주했으니…
로비아에게 보내는 편지
거룩하고 존경스러운 로비아 부인께:
제가 이 편지를 쓴 이유는, 먼저 불행한 비극에 대해 분명히 설명해드리기 위함입니다. 부인께서 저에게 그 성녀를 맞이하러 사람을 보내달라 하셨고, 저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답고 불쌍한 아가씨는 부인의 선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순간의 충동으로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하아, 이 되돌릴 수 없는 끔찍한 일 앞에서 저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인의 자비로운 신께서 부인의 슬픔을 달래 주시고, 고귀한 마음이 지나치게 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언급하신 「삼포 맷돌」에 관해서, 부인의 진심과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부인과 마찬가지로, 이 성물의 작동 원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이 일에 있어 저와 부인의 생각은 일치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고대의 성물을 가동할 다른 방법을 찾아 노드크라이 사람들——특히 부인의 고귀한 가문을 위해——영원한 번영의 낙원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앞으로 저는 전력을 다해 이 성물의 비밀을 밝혀내겠습니다.
더 사소하고 복잡한 문제는 가까운 시일 내에 부인과 만나 상세히 논의하고 싶습니다. 그전에 부디 이 미약한 선물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가장 친한 사람을 잃은 슬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부인의 고귀함을 존경합니다. 하얀 차르의 궁정 안에서도, 부인처럼 비범한 통찰과 깊은 대의를 지녔으며, 개인 감정보다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중시하는 여인은 드뭅니다. 우리의 입장, 이해관계, 목표는 일치하므로, 저는 부인과 한층 더 깊은 협력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당신의 영원하고, 충실한 친구이자 동맹
로트왕.
아일라에게 보내는 편지
아일라 아가씨께:
알리어 씨의 일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때 저는 그녀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고귀한 헌신 덕분에 우리는 로트왕을 무찌를 수 있었고, 수많은 생명이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야 그녀가 왜 제 친구의 신분을 사칭해 행동했는지 이해했습니다. 다음에 뵙게 되면 이 일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비록 저보다 먼저 아셨겠지만)
저는 당신의 생각을 평가하거나, 그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습니다. 다만 알리어의 유언을 존중해 아가씨께 전하고자 합니다. 그녀는 제가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돕기를 바랐습니다(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신은 저의 은인이니까요). 또한 당신이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습니다(유언 그대로 전하는 바입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언급하신 「테르피케라우나스의 화살」과 관련하여: 만약 그것이 칠흑의 재앙을 효율적으로 제거할 수 있고, 아가씨께서 이를 나누어 주신다면, 노드크라이의 모든 민중을 대신하여 당신께 감사드리겠습니다. 또한 로트왕이 아가씨께서 예견하신 대로 언젠가 다시 칠흑 속에서 부활한다면, 우리의 후계자(일단 이 조직을 「등지기」라 부르려 합니다. 이는 당신께서 밝혀주신 등불을 기리기 위함입니다)도 아가씨께서 주신 기술을 통해 다시 그를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아가씨께서 시간이 나실 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로비아 사후, 서리달 아이를 비롯한 수많은 일들로 바쁘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모쪼록 건강하시길.
솔로베이
연구 기록
???
실험 목표:
신형 배리어 생성기가 다양한 환경에서 생성하는 보호 배리어의 안정성 테스트.
테스트 장소: 예시 이미지 참고
현재 진도
기초 배리어 생성 관련:
달의 힘 에너지 변환 메커니즘을 성공적으로 구축했으며, 이를 통해 고밀도 에너지 장벽의 생성 가능성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현 단계에서는 배리어 생성기를 이용해 구형을 포함한 특정 형태의 에너지 장벽을 안정적으로 생성할 수 있다.
에너지 누출 및 재료 내구성 문제와 관련해, 생성기는 장시간 고강도 작동 시 과열과 재료 피로가 발생했으며, 이는 장비 수명을 단축시키고 소량의 에너지 누출을 동반했다. 누출 강도는 낮지만 장기적 영향은 불명확하므로, 잠재적 위험에 대비가 필요하다.
추가 결론은, 각지의 데이터를 회수한 뒤 종합 분석이 필요하다.
식견을 가린 가면
진짜 모습을 가려주는 차가운 가면. 보물 사냥단의 창립자 리드·밀러가 남긴 증표라고 한다. 장식은 없고, 오직 서리 색 달빛만이 순은으로 된 표면 위를 흐른다
오늘날 나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도는 한때 세상에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냈으나,
왕궁 앞의 차가운 교수대에서 살아남은 후,
순은 가면으로 지난날의 멋진 얼굴을 감췄으며,
칠흑의 재앙이 변방을 휩쓴 뒤엔, 다시 가면을 벗고 더는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대도가 그렇게 행동한 까닭에 대해서는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설이 민간에 떠돌았다.
어떤 이는, 겨울성의 대규모 수색을 피하고자 잠적한 것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형 집행자가 남긴 낙인이 사라질 때까지 상처를 숨기기 위함이라고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사랑이든 미움이든, 끝없이 쏟아지는 시선에 지친 탓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나, 그로 인해 과묵해진 대도가 가면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 은가면은 이미 대도의 상징이 되어,
그가 훔친 무수한 보물과, 변방 총독을 떨게 한 위대한 약탈 사건,
그리고 그가 가난한 자에게 뿌린 황금비처럼, 수많은 달콤한 꿈에 새겨졌다.
「신에게 기도했고, 주인에게 기도했으나, 그 울부짖음에 응답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신 또한 무력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인간처럼 달 아래 속세에 갇혀」
「두려움 속에서 절망스럽게 외쳤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이처럼 신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형제여」
「심지어 신은 자신조차 구할 수 없으니, 인간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것뿐이다」
은가면을 쓴 대도는 거리낌 없이 신을 조롱했고, 귀족들이 추종하는 허망한 명성 또한 경멸했다.
겨울의 차르든, 서리달의 여주인이든, 과묵한 도둑은 똑같은 침묵과 경멸로 응답했다.
고탑에서 솟구치는 달빛이 쏟아져 내려, 백은과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친 완고한 집착을 함께 불태울 때까지…
식견을 엮은 술잔
화려하게 장식된 술잔. 보물 사냥단의 창립자 리드·밀러가 남긴 증표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대도의 술잔에는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술도, 골목의 싸구려 술과 눈물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칠흑의 피바람이 두려운 전설로 변해가던 때이자, 등 제작자가 겨울성의 새로운 지배자에게서 변방 지대의 사면을 얻어낸 시절.
여왕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을까, 대도는 더 이상 권세를 잃은 귀족의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대신 신분과 가명을 바꾸어가며, 민요와 향기로운 술로 사람들의 상처를 위로했다.
소문에 따르면, 은가면을 벗은 대도의 얼굴은 설국 요정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는 완벽한 예법으로 왕공의 무도회에 출입했으며, 방탕한 자세로 천민의 술자리에서 취해 잠들었다.
그는 똑같이 하찮고 공허한 두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똑같이 마음을 홀리고 귀를 놀라게 하는 전설을 엮어냈다.
「친애하는 요정들이여, 이 연회를 위해 노래하라」
「곧 썩을 왕관과 불멸할 도둑의 이름에 건배하라」
「난 세상의 모든 눈물을 훔쳐 신에게 조롱의 키스를 선사하리라」
「쾌락도, 권력도 아닌, 오직 연인의 미소를 위하여」
연인 귓가의 속삭임에서 주정뱅이의 고함 소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민요 속 전능한 의적에게 빠져들었다.
노래하는 자와 노래의 주인공은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어, 지루한 밤마다 수많은 시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식견을 새긴 까마귀 깃털
칠흑같이 검은 까마귀 깃털. 보물 사냥단의 창립자 리드·밀러가 남긴 증표라고 한다
그 시절, 칠흑의 탁류는 아직 황량한 동토를 침식하지 않았고, 미천하고 빈곤한 자 또한 요정의 그늘에서 평온히 잠들 수 있었다.
꿈이 없는 평범한 일생은 고난이라 부를 수 없고, 기꺼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라면 누구든, 추위를 막을 약소한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스네즈나야 차르가 얼음 바다만큼 광활한 자비를, 왜소하고 단명하는 서민에게도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귀한 왕공들은 사치가 인간의 나약한 영혼을 더럽힌다는 오래된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공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서는 안 되었고, 백성을 위해 배부름의 죄를 짊어져야만 했다.
이 얼마나 자애로운 지혜인가, 이 얼마나 고귀한 본보기인가. 무수한 귀족과 서민이 함께 군주의 신성한 칭호를 외치며,
고통받는 백성을 위해 계급 질서를 정해주신, 엄한 아버지 같은 모든 요정의 주인을 칭송했다.
그러나 순백의 빛도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내듯, 귀족의 깊은 배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리가 등장했다.
누군가가 보물을 감추는 높은 담을 쌓는다면, 반드시 재화를 탐하는 악당이 나타나는 법이다.
생명을 집어삼키는 칠흑의 탁류가 아직 강림하지 않았을 무렵, 낙원과 까마귀 떼의 주인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그가 바로 훗날 세계에 이름을 떨친 대도 리드·밀러였다——
그의 내력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그가 만든 무수한 거짓말 속에서 그의 진심을 짐작할 수 있는 이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성결한 순백을 모욕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골목에 숨죽이고 있는 굶주림과 분노를 일깨우려는 것이었을까?
그 남자는 검은 까마귀 휘장을 달고, 은혜의 손길을 받지 못한 천민을 모아 최초의 보물 사냥단을 조직하여 반역을 설파했다.
「가난한 자여, 굶주린 자여, 모욕당한 자여, 짓밟힌 자여, 이 땅에 흘러든 나의 형제자매여」
「만약 그대 또한 부당한 운명에 짓눌려 억울함을 삼킨 적이 있다면,
만약 그대 또한 밤마다 이웃의 비극에 눈물 흘린 적이 있다면」
「만약 그대 또한 두려움 없는 안식처를 갈망한다면,
만약 그대 또한 눈물 흘리는 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면」
「그대도 그대의 형제자매와 함께, 속박의 사슬을 끊고 우리에 합류하라」
「죽은 자는 죽은 자가 묻게 하고, 너희는 일어나 오만한 자의 재산으로, 굶주린 자의 낙원을 세워라」
누군가의 연구 수기
…현재까지 관측 데이터에 오류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달 조각에 기생하는… 더 순수한 달의 힘은 본질적으로 원시 생명 형태에 가깝다. 우리는 해당 에너지가 생물을 죽이고 흡수해 에너지를 보충하는 법을 학습하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단, 미약한 이타적 반응도 함께 보이는데, 실험 대상에게는 불필요해 보인다. 제거가 필요하다…
…에너지가 너무 분산되어 있다. 이를 모아 순수한 달의 힘 형태로 구성할 방법이 필요하다…
노드크라이는 세계의 변방이자 항상 가장 취약한 지역이었다. 이 자아 증식이 가능한 달의 힘 생명체는 이론상 심연 에너지가 침식한 틈을 메울 수 있다. 단, 생명이라는 양분을 끊임없이 공급해야 한다…
…플레오브라젠스키, 이 불쌍한 빌어먹을 늙은이, 요정의 개자식. 너는 평생 이런 방법을 생각조차 못 하겠지? 이걸로 영광도, 명예도 전부 내 것이야.
수천만 모라는 물론이고, 벨로보디에 항구 전체 무역 수입의 5%를 받아도 남을 업적이지…
…성공하면, 나는 항구에 네 동상을 세워두고, 사람을 고용해 매일 침을 뱉게 할 거야. 학창 시절 네가 내 연구를 공개적으로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했을 때처럼…
병사의 수기·첫 번째
…중위의 지시로 이곳에 주둔하게 된 지도 벌써 3주가 지났다. 설계국의 재료를 수집하러 파견된 신병들에 비하면, 여긴 정말 지루할 정도로 평온한 곳이다. 이 빌어먹을 황량한 산속엔 도적은 고사하고,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일기를 쓰거나 잡초를 멍하니 쳐다보는 게 유일한 시간 보내기다. 두 교수가 얼른 망할 실험을 끝내주길 바란다. 그러면 다시 내 사랑하는 파라시카의 편지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군사학원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오만한 귀족 자식들에게 괴롭힘은 당하지는 않았을까…
…일레나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몰래 야영지를 빠져나가 사냥을 나갔다. 역시 해변 마을 출신답게 규정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볼코프 대장에게 딱 걸려 근무 태만으로 호되게 혼났지만, 그녀가 가져온 양고기는 모두 함께 맛있게 나눠 먹었다. 오랜만에 진짜 고기를 먹어서인지, 수도에서 먹던 것보다도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래서 이 거친 변방 사람들이 이런 곳에서 사는 걸지도…
…두 교수 간의 갈등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곳에 다른 오락거리가 없어서 그런지,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질 정도다. 둘 다 군수궁의 거물들이라, 서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이 달의 조각을 다루는 연구에서는 누가 더 먼저 돌파구를 마련해 여왕님의 총애를 받을지 경쟁하고 있다. 카르나츠키 교수는 더 이상 플레오브라젠스키 교수를 깔보는 걸 숨기지도 않는다. 대놓고 그의 딸의 약혼자를 미친놈이라 욕하며, 지금 위치까지 오른 건 순전히 (…) 덕분이라고 했다. 그 불쌍한 노인네는 그런 상스러운 말을 들어본 적도 없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거의 기절할 뻔했고, 요정어로 뭐라 뭐라 중얼거렸지만,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병사의 수기·두 번째
…뭔가 이상하다. 페트렌코는 여왕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더니, 자정 무렵 짐승의 거친 숨 같으면서도 죽어가는 병사의 흐느낌 같은 섬뜩한 신음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계 근무 중이던 일레나를 포함해 우리 중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야영지 근처에서 무거운 것을 질질 끌고 지나간 듯한 기묘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런 흔적을 남길 생명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볼코프 대장은 플레오브라젠스키 교수의 부하들이 장난을 친 것으로 의심하고 야영지 주변에 함정을 더 설치했다. 만일을 대비해 우리 목숨값보다 더 비싼 경비 장치까지 가동했다. 나중에 에너지 낭비에 대해 윗선에 어떻게 보고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럴듯한 핑계쯤은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카르나츠키 교수의 연구는 제법 순조로운 듯하다. 점심시간엔 우리 같은 일반 병사(그전까지는 우리를 멍청한 노예라 불렀다)에게 자신의 발견을 열정적으로 떠들어댔다. 시체처럼 야윈 그의 얼굴에 불쾌할 만큼 붉은 기운이 떠올랐고, 되풀이되는 말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달의 조각에서 「가장 순수한 광원」을 추출했고, 이제 여왕님의 소원을 위해 최초의 불꽃을 피워 세계의 장막을 찢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상이 이루어지길 빌 수밖에 없었다…
…난 그 짜증 나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어 볼코프 대장에게 사냥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요 며칠 기온이 이상하리만큼 낮았고, 공기에는 늘 눅눅하고 곰팡이 핀 듯한 냄새가 맴돌았다. 예전엔 자주 보이던 산양도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 자주 사냥해서일지도, 추위를 피해 옮겨 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야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건 사냥이 아니었다. 그 산양은 누군가 진열해 둔 표본처럼 굳어 있었다. 얼굴에는 산양답지 않은 표정이 떠 있었고, 탁한 눈은 물고기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산양은 분명 살아 있었다. 가슴을 가를 때까지도 심장은 뛰었으니까. 단검이 박히자 악취 나는, 먹물빛 초록 피가 터져 나왔지만 산양은 움직이지 않았다. 부푼 두 눈은 앞만 보았다. 죽음이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이…
…여왕님께 용서를 빈다. 나는 이 일을 소대원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양고기는 맛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굳이 다른 이들까지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카르나츠키 교수가 연구만 마치면, 우리는 이 끔찍한 곳을 떠날 수 있을 테니까…
병사의 수기·세 번째
…에게…
누구에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 쓰는 것일지도. 이 땅과 우리가 하는 이 혐오스러운 일이 나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전에, 우스울 정도로 연약한 나의 이성이 잠시나마 나에게 속해 있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내 이름은 표트르·드미트리예비치·올로프. 스네즈나야와 스네즈나야의 여왕을 위해 노드크라이 제6중대에 복무 중이다. 나는 드미트리·세르게예비치·올로프와 예프로시니야 이바노브나 오를로바의 둘째 아들이며, 내 출신에 대해 어떤 열등감도 느끼지 않는다.
우리 중대는 여기서 전멸했다.
단지 E·스미르노바 병사만이 A·볼코프 중사의 희생 덕에 협곡에서 탈출해, 설계국에 죽은 자들의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만약 누군가 이 종이를 보게 된다면, 우리 상급자에게 전해주길 바란다. 스미르노바 병사는 탈영병이 아니며, 이곳에서 벌어진 참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A·Z·카르나츠키와 V·A·플레오브라젠스키의 그 빌어먹을 실험이 이 모든 것을 초래했다. 그들 모두 죽었다. 여왕님께서 그들의 죽음을 저주하시길, 그들이 결코 순결한 설원에서 안식하지 못하도록.
나는 그들이 도대체 무슨 신성모독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 색은 단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것들은 원래부터 빌어먹을 돌 속에 있었다. 달에서 떨어졌다는 그 돌 말이다. 카르나츠키와 플레오브라젠스키가 각각 그것들을 깨웠다(종이에 이해할 수 없는, 저속한 욕설이 십수 차례나 반복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그것들이 왔다. 파라스케비야, 나의 사랑하는 파라시카, 오빠를 용서해. 여왕님이시여,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것들이 왔다. 살려줘. 그것들이 왔다.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조잡한 필체의 수기·1
조잡한 필체의 수기·1
……
캐러밴을 따라 히시섬에 다녀왔다. 그 사람들은 스스로를 「서리달 아이」라고 불렀다. 다닐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달의 소녀를 믿는 신도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 좀… 독특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그들 대부분은 달의 힘 장치를 몹시 꺼리며, 그것이 달의 신의 축복을 남용하는 거라 여긴다. 그래서 캐러밴이 히시섬에 머무는 동안 나는 우리 쪽 장치만 정비하면 되었고, 그들의 기계는 고칠 필요가 없었다.
뜻밖에도 열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쉬는 틈을 타 다가와 기계 원리에 대해 물어왔다. 아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던 모양이다. 떠나는 순간까지도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니까. 아이는 성격이 산만했지만 열정이 있었고, 재능 또한 눈에 띄었다. 내가 알려 준 기초 지식도 금세 이해했다. 하지만 서리달 아이는 그 아이가 기계를 만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여행 상인들과 교환한 기술 서적 몇 권을 건네주었다(한때 다닐은 그 책자들이 내 기억을 되찾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고 여겼다). 아이가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고, 그 책에서 조금이나마 배움을 얻기를 바란다.
……
……
이번에는 나샤 마을에 오래 머물렀다. 캐러밴과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건 처음이었다. 다닐은 데미얀과 금세 친해졌다. 데미얀은 흔쾌히 내 숙소를 마련해 주었는데, 자기 집 바로 옆이었다. 다닐 일행이 스네즈나야성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신세를 져야 했지만, 데미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스패너 할아버지」라는 별명의 유래와 기계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좀 부끄럽다. 내가 심심할까 봐 말을 걸어준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가 어린 나이에 나샤 마을에서 혼자 「기함」을 운영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다닐은 떠나기 전에 나에게 스네즈나야성이나 신 키테시성에 함께 갈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내 기술이 그곳에서 비롯되었고, 잃어버린 신분이나 과거도 거기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그러나 알 수 없는 불안이 내 마음을 옭아맸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아마 잃어버린 기억 때문이거나, 사고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망설이자, 다닐은 평소처럼 대신 결정을 내려 주고 준비까지 해 주었다.
과거의 불행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다닐과 캐러밴 사람들을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았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 바닷가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나를 받아주었지만, 내가 갚을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보잘것없다…
……
……
나샤 마을에는 아이들이 많지만, 나는 그들의 처지를 섣불리 짐작하지 않으려 한다. 나처럼, 그들 역시 동정이나 연민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 이런 말을 적다 보니 누군가의 오만한 얼굴이 떠오르는 듯하다. 다만 아이들이 내 이야기에 흥미를 보인 건 사실이다. 아니면 내가 가져온 사탕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방법은 다닐에게서 배운 것이다. 나는 늘 주머니에 사탕을 챙겨 둔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그 아이들 중 한 명은 스네구로치카(눈 아가씨) 이야기보다 내가 허리에 차고 다니는 도구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그 아이에게 직접 만져 보고 싶냐고 물었더니,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스페란자」의 사장 카르야는 평소에도 아이들을 잘 챙겨 주는데, 그날도 우리를 위해 자리를 비워 주었다. 덕분에 나는 아이노라라는 아이에게 기계 기술과 기계를 다루는 법을 마음껏 들려줄 수 있었다. 내가 운 좋게 다닐에게 거둬진 것처럼, 이 아이들도 저마다의 행운을 찾은 셈이다. 하아, 이 불행한 세상에도 이렇게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있었다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알아챘다. 아이노는 단순히 기계에 관심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놀라운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에게 톱니바퀴 소재를 구분하는 법, 압력계를 보정하는 법, 안전밸브를 조절하는 법을 가르치자, 누구보다 빨리 익혔을 뿐 아니라 응용까지 해냈다. 익숙지 않은 도구로 두드리고 조여서 부서진 부품들로 정교한 장치를 조립해 내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뻤다. 그녀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았지만, 이미 자신만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닐 일행이 스네즈나야성에서 돌아왔고, 나도 짐을 챙겨 캐러밴과 함께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아쉽지만, 여기서 더 오래 머물 수 없을 것 같다…
조잡한 필체의 수기·2
조잡한 필체의 수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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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신 키테시성에서 남하한 여행 상인을 만났다. 그녀와 얘기하면서 참 즐거웠고, 묘하게 그리운 느낌도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나도 신 키테시성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운명의 장난이란 참 뜬금없다. 그녀가 가져온 신문에서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사진 속 사람은 흰머리가 없었고, 웃는 얼굴도 평화로워 보였다. 그 얼굴은 10년 전… 어쩌면 더 오래된 내 모습이었다.
신문 구석에 실린 부고 기사를 보고서야, 나는 잊은 기억을 모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셰스테닌 가주는 이미 공식적으로 「사망」했고, 내 가문의 이름과 재산은 다뉴샤와 조릭이 계승했다. 조릭… 10년이 흐른 지금도, 그날 누가 나를 배 밖으로 밀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조릭은 반응할 틈조차 없었을 것이다. 행운아호에서 일어난 일은 그저 불행한 해난 사고였을 뿐이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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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샤, 내 딸아. 어머니를 잃은 널 위로해 주려고 애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넌 아버지까지 잃고 말았구나…
하지만 이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죽은」 자의 방문은 환영받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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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잡한 필체의 수기·3
조잡한 필체의 수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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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네트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고 있다. 다닐이 그 아이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최고의 의사에게 데려갔지만 소용없었다. 우리는 결과를 숨겼으나, 그 똑똑한 아이는 눈치채고 있었다. 가끔은 차라리 덜 똑똑했으면 한다. 그러면 그 여윈 얼굴에도 미소가 남아 있지 않을까?
가엾은 티네트야. 난 네가 괴팍하게 구는 것과 말수가 적은 것, 그리고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은 전부 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이라는 걸 안단다. 네 눈동자 속 광채는 마치 꺼져가는 촛불과도 같지. 하아, 내가 어떻게 해야 그 희미한 촛불을 지켜낼 수 있을까?
……
…티네트의 병이 악화되어 캐러밴과 함께 여행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푸른 호박 호수에 캠프를 세웠다. 이곳엔 정체불명의 지하 창고와 「황금 시대의 유산」이라 불리는 물건들이 많았다. 나에겐 안성맞춤이어서 공방으로 개조했고, 다닐과 캐러밴 사람들도 도와주었다.
침수된 조사 노트
……
피해자
M·Z·프레하노프. 고리대금업자.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됨. 온몸에 수차례 칼에 찔린 흔적이 있음
V·T·야쿠브. 검은 가문비나무 상회의 조타수. 기이한 사고로 사망. 눈사태에 휘말림
용의자
I·K·드미트리. 전직 철도 노동자. 프레한노프의 착취로 인해 파산함
O·V·코즐로프. 상회 이인자. 최근 야쿠브와 사이가 좋지 않음
동기 측면에서 가장 유력한 두 용의자가 모두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시해 조사가 한때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그 지나치게 완벽한 알리바이 때문에, 오히려 무언가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두 사건은 표면상 전혀 무관해 보이지만 동기는 서로의 용의자를 가리킨다. 이것은 분명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드미트리와 코즐로프는 신분 차이도 크고, 생활 영역이나 인간관계도 전혀 겹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드미트리의 인간관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드미트리가 열차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시절, 코즐로프는 바로 그 노선의 일반 승무원이었다. 그는 승무원으로서의 과거를 부끄러워했는지, 검은 가문비나무 상회에 들어간 뒤 그 경력을 철저히 숨겨 왔다.
둘은 열차 사고를 계기로 뜻밖에 재회했고, 과거에 대한 증오와 새 권력에 대한 갈망으로 서로 결탁했다. 드미트리는 미리 입수한 내부 정보로 눈사태 「사고」를 만들어 우연처럼 꾸몄고, 코즐로프는 익숙한 수법으로 프레한노프를 폐창고로 유인해 그곳에서 제거했다.
어리석은 자들은 운명을 속일 수 있다고 믿지만, 이 세상에 완전범죄란 없다. 그저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
……
아우니의 메모
소라 문양이 새겨진 종이에 적은 메모.
아우니가 쓴 것처럼 보인다. 몰리 계곡에서 생활하는 킁킁 두더지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사실도 섞여 있다고 하는데 어느 부분인지는 알 수 없다…
몰리 할아버지네 가족은 몰리 계곡 깊숙한 동굴에 산다. 거긴 축축하고, 오래된 나무 뿌리 냄새가 난다. 고철 덩어리를 질질 끌고 온 시끄러운 덩치들이 몰리 계곡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여긴 아주 조용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밤이 되어 덩치들이 떠난 뒤에야, 몰리 가족은 동굴을 나와 몰리 계곡에서 먹이를 찾거나 달빛 벌레와 놀곤 한다.
몰리 동생은 백령과나 달빛 벌레보다 달을 더 좋아한다. 몰리 계곡에서 보이는 달은 아주 크고 둥글며, 접시처럼 생겼다. 물론 하얀색이다(유르바 오빠 말로는 킁킁 두더지들은 시력이 썩 좋지 않다. 대신 코와 귀가 아주 예민해서 멀리 있어도, 몰리 동생이라면 달의 냄새를 맡을지도 모른다. 그 냄새가 백령과처럼 달콤할지도).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면 그림자 없는 두더지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달빛 속에서 아른거리며 돌아다니는데, 바람에 흩날리는 연기 같다. 서로 말은 주고받지만 몰리 동생을 대화에 끼워 주지 않는다. 마치 그녀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어쩌면 몰리 동생이 아직 자신의 그림자를 버리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듣기로 땅굴단 같은 신비한 조직들은 저마다 규칙이 있어, 다른 그림자 없는 두더지의 소개가 필요하거나 어떤 의식을 치러야 정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옆에서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듣기만 해도 꽤 재미있다. 그 중 한 마리는 아주 먼 데서 온 킁킁 두더지인데, 자기 집이 없어서 어디든 다 자기 집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설산도 가 봤고, 사막도 지났으며, 아주 높은 산도 넘었고, 깊은 바닷속까지 들어가 봤다고 했다. 「그럼 거기에도 신선한 백령과가 있어?」 아마 현지의 두더지가 물은 것 같다. 「내가 알기로는 없어. 대신 다른 과일은 많아」라는 대답에, 현지 두더지는 입을 삐죽였는데, 진짜 백령과를 무척 좋아하는 눈치였다.
몰리 동생도 백령과를 좋아하지만, 다른 과일이 궁금해졌기에, 몰리 계곡을 떠나 모험에 나섰다. 그녀는 흙 속을 오래 파고 나가다가 덩치들이 많은 곳에 닿았다. 밤인데도 그곳은 온통 밝고 소음으로 가득해, 달이 어디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여러 냄새가 뒤섞였지만 대부분 그녀 취향은 아니었다. 결국 익숙한 백령과 향을 따라가 과일이 산처럼 쌓인 곳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과일이 많았고 향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몇 개만 얻고 싶었지만, 그날은 운이 따르지 않았다. 가끔 그런 날도 있는 법이다.
몰리 계곡으로 돌아오자 모두가 그녀를 걱정했다. 혼자 그렇게 멀리까지 갔다니 다들 깜짝 놀랐다. 몰리 계곡에서 사는 게 좋은데 왜 굳이 다른 데로 가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몰리 동생은 그림자 없는 두더지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림자 없는 두더지가 어디 있어? 그건 네가 꾼 꿈이겠지」 몰리 오빠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여동생이 몰리 계곡을 떠난 것도 못마땅해했다. 다른 가족들도 대체로 오빠와 비슷한 반응이었고, 다들 백령과가 다른 과일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만약 다음번 달이 아주 밝은 밤에도 그림자 없는 두더지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걸 꿈으로 치자. 몰리 동생은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몰리 계곡의 삶이 싫었던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달이 떠오르고 달빛이 땅에 내리자, 정말로 그들이 다시 나타나 지난번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했다. 그렇다면 이건 꿈이 아니라, 달이 그녀에게 준 인도였다. 몰리 동생은 무척 기뻤다. 그리고 어느 달 밝은 밤, 그녀는 또다시 혼자 몰리 계곡을 떠났다. 이번에는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설산이나 사막,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에서 신선한 백령과보다 더 맛있는 과일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연구 일지
???
……
배리어 생성기의 안정성에 대한 열 번째 실험 데이터를 정리했다. 데이터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했고, 에너지 소모가 너무 빨랐다.
……
실험 장소를 변경했지만 조작 실수로 기갑선 한 대가 박살 났고, 현장은 큰 혼란에 빠졌다. 데이터는 회수했지만, 사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추가 시간이 들었다.
……
새로운 배리어 샘플이 도착했다. 이전 대비 크기가 약 1/3 감소했다. 오전 초기 테스트 결과, 성능은 양호했으나 에너지 소모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
에너지 소모 모델을 수정했고, 데이터 적합도가 다소 향상됐다.
……
부서 이동 신청이 기각되었다. 실망스럽지만 예상된 결과였다. 해당 프로젝트는 최고 기밀로 분류되어 극소수 인원만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산이 충분했거나, 식물이나 동물을 연구하는 녀석들과 공간을 같이 쓰지 않았더라면, 더 확실한 성과를 냈을 텐데…
……
연구 기록
???
실험 목표:
신형 배리어 생성기가 다양한 환경에서 생성하는 보호 배리어의 안정성 테스트.
테스트 장소: 예시 이미지 참고.
<image name=UI_ReadPic_FatuiShieldMap/>
현재 진도:
기초 배리어 생성 관련: 달의 힘 에너지 변환 메커니즘을 성공적으로 구축했으며, 이를 통해 고밀도 에너지 장벽의 생성 가능성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현 단계에서는 배리어 생성기를 이용해 구형을 포함한 특정 형태의 에너지 장벽을 안정적으로 생성할 수 있다.
에너지 누출 및 재료 내구성 문제와 관련해, 생성기는 장시간 고강도 작동 시 과열과 재료 피로가 발생했으며, 이는 장비 수명을 단축시키고 소량의 에너지 누출을 동반했다. 누출 강도는 낮지만 장기적 영향은 불명확하므로, 잠재적 위험에 대비가 필요하다.
추가 결론은, 각지의 데이터를 회수한 뒤 종합 분석이 필요하다.
마이테의 메모
소라 문양이 새겨진 종이에 적은 메모.
마이테가 달의 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차르 꽃게를 관찰하고 적은 메모다. 아직 증명되지 않은 꽃게의 사회 형태에 대한 주관적 추측이 대량 섞여 있는 것 같다
차르 꽃게 어르신은 서리달 아이라는 괴인들의 마을 옆에 살고 있으며, 전설에 따르면 이미 수백 살이나 되었다고 한다.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커질 수 있겠어?) 내가 본 어떤 꽃게보다 훨씬 크며, 「집」은 평범한 소라 껍데기가 아니라 작은 언덕만 한 거대한 소라다. (우리 깃발에 그린 소라보다도 훨씬 크다!) 마치 작은 요새 같기도 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위에 달의 힘을 머금은 이끼가 자라 동굴 속에서 별처럼 빛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차르 꽃게 어르신의 왕관이다
따라서 근처의 작은 꽃게들은 모두 차르 꽃게 어르신의 신하들이다. 불쌍한 작은 꽃게들은 늘 분주히 움직이며 백령과나 작은 물고기, 그리고 내가 이름조차 모르는 먹이를 동굴 깊숙한 곳에 바친다. 나는 꽃게들이 반짝이는 돌조각과 달빛 은을 가져가는 것을 두 번이나 본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것이 차르 꽃게 어르신께 바치는 「세금」이 아닐까 싶다. 대도 리드·밀러 시대에 스네즈나야에서 파견된 총독이 나샤 마을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었다는데, 그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차르 꽃게 어르신이 바라는 것은, 어쩌면 무한한 백령과나 작은 물고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제 오후, 나는 어르신이 굴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어르신은 마치 산을 짊어진 듯 느릿하게 걸었고, 걸음마다 땅의 자갈이 떨렸다. 그때 아주 작은 꽃게가 불쌍할 만큼 작은 물고기를 그의 발치까지 끌고 왔으나, 어르신은 잠시 내려다본 뒤 커다란 집게를 가볍게 흔들 뿐이었다. 그러자 작은 꽃게는 겁에 질려 물고기를 버리고 모래 속으로 숨어버렸다.
차르 꽃게 어르신은 그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 작은 집게로 물고기를 옆으로 밀어내고는, 마치 먼바다를 바라보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국왕(차르)이 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요새와 왕관이 있지만, 모든 꽃게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벚꽃 해파리처럼 촉수로 만질 수 있는 친구가 없으니까. (세미온은 해파리가 촉수로 소통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꽃게들도 집게로 비슷한 신호를 주고받지 않을까?)
너무 궁금하다. 대체 어디서 저렇게 거대한 껍데기를 구한 걸까? 어르신이 그곳에 살기 전, 더 거대한 국왕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지금보다 더 커진다면, 더 화려한 궁전으로 옮겨갈까? 다음에 잘 익은 백령과를 바치고 어르신의 껍데기를 살펴봐야… 아, 아니다. 생각해 보니 그건 무모하다. 대도가 귀족과 너무 가까워지면 불행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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